요즘 ‘반출생주의’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대충 요약하면 “새로운 생명을 낳는 행위는 문제적이거나,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출생이 본인 동의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 삶에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점, 그 고통을 아이에게 떠넘기는 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한지 묻는 방식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철학적 문제제기”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논의가 실제로 유통되는 방식과 결론은 꽤 불편하고, 때로는 비겁해 보이기도 한다. 나는 반출생주의가 말하는 ‘고통’이라는 소재가 결국 **현실의 핵심 문제(특히 빈곤)**를 희석시키거나, 약자를 향한 도덕적 질타로 변질되기 쉽다고 느낀다.
1) “고통은 악이니 출산은 문제다”라는 전제부터 어색하다
반출생주의가 힘을 얻는 가장 큰 근거는 단순하다.
“낳지 않으면 고통은 0이고, 낳으면 고통은 0보다 커진다(>0). 그러니 낳지 않는 편이 윤리적으로 낫다.”
그런데 이 논리는 이상하다. 왜냐하면 삶을 평가할 때 고통만 보며, ‘플러스(+)’의 가능성을 너무 쉽게 밀어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삶은 0과 -만 있는 구조가 아니다. 사람은 좋은 감정도 느낀다. 성취의 기쁨, 사랑, 관계, 의미, 성장, 감사 같은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기쁨이 없었겠지”라는 사실을 아쉬움으로 느끼기도 한다.
물론 반출생주의 쪽에서는 “태어나지 않으면 쾌락이 없는 건 손해가 아니다” 같은 방식으로 반박하곤 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건 애초에 게임 규칙을 자기 편한 방향으로 짜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의 부재는 선’으로 크게 칠하고, ‘쾌락의 부재는 악이 아니다’로 처리해버리면,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 규칙 자체가 설득력 있는지부터 논의해야 한다.
결국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통은 분명 문제지만, 고통만을 기준으로 출생을 판단하는 건 인간 삶의 핵심을 잘라내는 방식이다.
2) 현대적 관점에서 “고통”은 단순한 악이 아니다
요즘 뇌과학이나 심리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의 행복이 절대적인 값이라기보다 **대비(contrast)**와 회복 속에서 더 선명해진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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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는 그냥 “기분 좋은 사건”이 아니라, 그 과정의 스트레스와 노력 덕분에 더 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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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시기를 견뎌본 사람은 좋은 시기가 왔을 때 감사함을 더 크게 느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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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늘 좋은 건 아니지만, 어떤 고통은 사람을 단단하게 하고 삶의 의미를 만든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있다. “모든 고통이 좋다”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감당 가능한 고통이, 다른 누군가에겐 회복 불가능한 고통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땀 흘리는 노력’을 꿈에 다가가는 희열로 느끼지만, 어떤 사람은 그냥 고문처럼 느낄 수 있다. 배신의 경험이 어떤 사람을 더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도 한다.
결국 문제는 고통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느냐다. 그리고 그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 하나가 아니라 사회적 조건이다.
3) 그래서 나는 고통을 “출산 금지”가 아니라 “사회 개선의 이유”로 본다
고통의 ‘적정선’은 정의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가 희망을 꺾고, 어느 정도가 버틸 수 있는지,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더 필요한 건 이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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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안전망(복지, 의료, 교육, 돌봄, 정신건강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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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의 지지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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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가치관과 회복탄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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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환경
즉,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럼 낳지 말자”로 이어지기보다, 오히려 **‘고통이 사람을 파괴하지 않게 만들자’**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게 훨씬 책임 있는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4) “동의” 논증도 깔끔해 보이지만, 현실 윤리로는 과잉이다
반출생주의가 자주 쓰는 또 다른 카드가 “출생은 동의 없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본인에게 묻지 않고 태어나게 하는 것이 정당하냐는 질문은 직관적으로 꽤 그럴듯하다.
하지만 동의를 그렇게 절대화해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아이를 낳는 것뿐 아니라, 아이의 치료, 교육, 이사, 보호 같은 대부분의 결정이 “동의 없이 이루어진다.” 현실에서 부모가 책임을 지고 대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 동의를 절대 기준으로 놓으면, 윤리가 아니라 현실 자체가 굴러가지 않는다.
더 나아가, “동의하지 않았으니 태어나는 것 자체가 문제다”라고까지 가면, 이 논리는 삶을 긍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공허하게 들린다. 어떤 사람은 태어난 것에 만족하고, 의미를 만들고, 삶을 확장하며 살기도 한다. 동의를 논점으로 삼는 건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 출생을 비윤리로 확정하는 건 과잉이라고 느낀다.
5) 내가 반출생주의를 특히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 결국 빈곤층을 겨누기 쉽다
여기서부터가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반출생주의는 표면적으로는 “출산 일반”을 다루는 철학처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에서 이 논리가 유통될 때는, 너무 쉽게 이런 결론으로 흘러간다.
“아이에게 고통을 줄 수 있으니 낳지 마라.”
“책임질 자격이 없으면 낳지 마라.”
그리고 현실에서 “자격”은 종종 돈으로 환산된다. 즉, 빈곤한 사람에게만 칼끝이 향한다.
더 아이러니한 건, 반출생주의가 예시로 드는 많은 고통(교육, 치료, 기회, 안전)은 빈곤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고, 빈곤이 아니면 상당 부분 완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반출생주의는 결과적으로 이런 프레임을 만들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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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빈곤, 불평등, 복지 부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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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선택 문제로 바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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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낳지 마”로 끝내버린다.
나는 이 지점에서 반출생주의가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보다, 오히려 현실의 불평등을 “출산 금지”라는 말로 덮어버리는 비겁한 방식처럼 느껴진다.
학대가 문제라면 학대를 줄이는 시스템과 지원을 공격해야 하고, 질병이 문제라면 의료 접근성과 치료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빈곤이 문제라면 빈곤 자체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걸 “출생이 문제”로 묶어버리면, 타깃이 틀어진다. 그건 문제 해결이 아니라 책임 회피처럼 보인다.
6) 아이가 있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 설령 “프로그램”이어도, 그 의미는 실제다
나는 출생의 도덕적 의미를 학술적으로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아이가 있는 입장에서 드는 감정은 분명하다.
아이가 있음으로써 밀려오는 행복이 있다. 이 아이를 지키고 싶고,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고 싶고, 그 과정이 내 삶의 소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진화적 프로그램, 호르몬, 유전자의 전략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설령 그게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내가 느끼는 행복이 가짜가 되는 건 아니다. 배고픔도 호르몬이고, 사랑도 호르몬이고, 안정감도 신경전달물질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허상’이 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고, 어떤 방향으로 나를 성장시키고, 어떤 책임을 가능하게 하느냐이다.
내가 아이를 통해 느끼는 행복과 책임감은 다른 어떤 행위로도 완전히 대체되기 어렵다. 그 감정이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한, 그 의미는 실제다.
7) 내가 바라는 아이의 삶: “고통이 없는 삶”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는 삶”
나는 아이에게 고통이 없는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리고 고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내가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건 단 하나다.
넘어져도 괜찮으니,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북돋아 주는 것.
어떤 상황이 와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교육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윤리는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회복탄력성은 남을 밟고 서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복구하는 힘이어야 하니까.
결론: 반출생주의는 질문을 던질 수는 있지만, 답으로는 위험하다
반출생주의는 “고통”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질문이 곧바로 “출산은 문제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순간, 나는 그 논리가 빈약해지고 위험해진다고 본다.
삶의 고통은 없앨 대상이 아니라, 회복할 수 있게 만들 대상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하는 방향은 “낳지 말자”가 아니라, “살 수 있게 만들자”다.
고통을 이유로 출생을 부정하는 철학보다,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을 만들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더 현실적이고 더 정직한 해답이라고 믿는다.